<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장편소설. 유물론자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위험한 얘기를 해학과 눈물로 감싸 꿀꺽 넘어가게 말아주던 작가가 수평마을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라남도 구례시 산촌 '수평마을'. 마을회관에 긴급 소집된 평균연령 일흔여덟살의 주민들은 마을의 자칭 지식인 '윤 선생'의 긴급경보를 청취중이다. 서울에서 이사 와 마을 평균연령을 낮추는 공헌을 두 젊은 여성 성진과 혜진, '찌니들'에 관한 주의보. "찌니들이 말이여. 레지랴 레지."
레즈비언이라는 말조차 입에 붙지 않는 지역 노인들은 그들의 사생활을 선을 넘는 방식으로 궁금해하기도 하다 '찌니들이 참말 레지라 헌들 레지먼 맘대로 쪼까낼 권리가 우덜헌티 있다요?'하는 식으로 천부인권 개념을 '발견'하며 더듬더듬 찌니들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나간다. 세상을 피해 수평마을에 자리잡은 '찌니들'은 '입으로는 성희롱을 늘어놓으면서 무든 뭐든 아낌없이 나눠주는 마음'에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수평마을 사람들이 되어간다.
판소리를 보듯 낄낄대다 찡해지다 미워하다 끝내 애틋해지는 소설이다. 앵무새와 닭의 위계, 결혼제도와 '레지'의 결합의 위계, 지역과 도시의 위계, 젊음과 나이듦의 냄새의 위계, 외국인 신부와 내국인의 위계를 급진적으로 오가며 정지아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실용적이고 대범한 얼굴을 그려낸다. 어떤 혁명은 선 넘기의 방식으로 시작한다. 잎을 찌고 나물을 무쳐 만든 고소한 음식을 나누며 식구가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 슬쩍 끼어들어 한 잔 하고 싶어지는 정겹고 위험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