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파르티잔'(<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2010)>)은 한때 '세계대전'(<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2011)>)을 꿈꿨다.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인 서효인이 6년 만에 발표한 세번째 시집. 여수에서, 불광동으로, 강릉에서 양화진으로, 연희동에서 송정리로, 시는 장소를 옮기며 생각을 잇는다. 떠돎, 혹은 이동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한다. 물리적인 공간과 공간의 이동 사이, "역마살이 도질까 시간을 뭉개고 앉는" (해로운 자세 中) 동안도 무심하게 시간이 흐르고 장소에 관한 정념은 어느새 기억이 된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여수 中) 그 도시에 관한 기억은 선명하다.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내뿜는 푸른 연기,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버스의 진동, 시커먼 빨래,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나타난 바다, 그리고 길, 마침내 여수. 차곡차곡 감각이 쌓이고, 여자를 닮은 도시는 기억이 된다. 출근길 만원 버스에서의 나와 1968년의 무장공비 김신조가 함께 지났을 자유로. 찢어진 선거 벽보가 있었고, 할아버지가 죽었고, 내가 자주 토악질하던 벽이 있던 송정리. 다층적인 기억이 겹치고, 우리가 함께, 혹은 홀로 걸었던 길들도 엇갈리고 이어진다. 당신의 장소와 나의 장소는 다르다. 그렇게 기억하는 동안, 오래 물고 삭여야 했던 것들이 어느새 더듬더듬 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