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백 년 전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다.” 천선란이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온 가면은 소설가와 딸이었다. 소설가로서 글을 쓰는 일, 재활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를 돌보는 일, 그리고 아빠에게는 ‘자랑스러운 딸을 둔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은 마음. 그 사이 ‘나로서의 삶’은 늘 최하위에 놓이거나 아예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다 누구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고 어떤 가면도 쓰지 않아도 되는 새벽 네 시, 작가는 오래 비워두었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 책은 그렇게 잃어버린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 이야기다.
문화 교류 프로그램의 기회로 한 달을 머물게 된 독일 뮌헨에서 작가는 자주 공원을 찾는다. 산미 있는 독일 빵을 천천히 씹고, 음악 대신 풀과 새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벤치에 앉아 나뭇잎 그림자가 내려앉은 자신의 손과 다리를 바라본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야 비로소 소설가도 딸도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원 끝자락 낡은 골대에 매일같이 공을 던지는 소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마음도 하나씩 되찾는다. 거듭 실패해도 부끄럽지 않은 것, 그저 내가 나를 만족시킬 때까지 끝없이 몰두하는 힘을.
한 달 동안 실컷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 그는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시간이 그에게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법이 아니라, 다시 기꺼이 가면을 쓰고 살아갈 힘을 건넸다는 점이다.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느라 정작 자신의 이름을 잊고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잠시 나로 살아갈 장소가 필요할 것이다. 빵을 오래 씹고, 음악 없이 공원을 걸으며, 좋아하는 일에 몇 번이고 공을 던져보는 일. <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는 그런 ‘자기만의 공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