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의 이성을 의심 없이 믿던 때, 예술과 문화의 찬란하고 성실한 발전을 믿던 때, 세계에 대한 안정감과 인간 존엄의 굳센 의미를 믿던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리고 그 모든 믿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살게 되는가. 이 책은 역사 속 가장 찬란했던 유럽과 그 모든 빛이 끔찍한 오물들로 더럽혀진 유럽을 모두 목격한 개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회고록이다.
존재를 가장 깊이 절망하게 하는 것은 기쁨과 환희를 맛보게 한 뒤, 그것을 흔적도 없이 거두어가는 일이다. 공포를 넘어서는 허망함. 역사 속에서 이 거대한 야바위가 존재했었고 그 결과 세계가 어떤 야만까지 되돌아갔었는지 우리는 똑똑히 안다. 이것은 모두 지난 역사에 봉인된 일일까? 지금 다시 지구촌 곳곳에선 전쟁의 포성이 울리고 전 세계에 극우의 물결이 넘실댄다. 반성과 회복이 쌓여갈 것이라고 생각한 미래의 날들에 또다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이 책의 시대 묘사에 현재가 겹친다.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를 살게 되는 걸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두려움이 커진다.
머무는 자리마다 폐허가 되고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하기를 여러 번, 남은 힘이 모두 고갈된 츠바이크는 이 모든 기록을 후대에 남기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 지었다. "나의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그들은 부디 긴 밤이 지난 뒤의 새벽빛을 볼 수 있기를! 너무나 조급한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떠납니다." 지성과 자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그는 마지막까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났다. 그가 남긴 절실한 기록에서 깨달음을 채굴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